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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상문

브이 포 벤데타

by ehei 2021. 1. 8.

영화를 무척이나 감명깊게 보았던 탓에 언젠가 책을 꼭 봐야지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게 10년이 넘었다. 모두들 재택근무하는 와중에 홀로 출근하는 덕에 식사 중에 독서를 할 여유가 생겼다. 이건 내 오랜 습관이었는데 결혼하면서 없애긴 했다. 어쨌든 주로 비주얼 노블을 본다. 오늘도 점심 먹을 때 볼 책을 찾기 위해 회사 도서관을 열심히 살핀 덕에 발견했다.

 

이 책은 파시즘에 사로잡힌 영국의 모습을 그린다. 영국 주변은 더욱 암울하다. 핵전쟁의 영향으로 다른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어찌된 영문인지 영국은 그럭저럭 돌아간다. 게다가 놀라운 대중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명이란 슈퍼 컴퓨터도 가지고 있다. 집권층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들은 갱으로서 내전에서 승리한 조직이다. 그럼에도 내 생각에는 생각보다 온화하게 통치한다. 사람들을 불시에 잡아넣고 간신히 연명할 정도로 배급한다고 하는데, 등장인물들을 보면 대충 살만해 보인다. 저자가 밝힌대로 대처리즘 치하의 영국에 맞추려고 하다보니 빚어진 일 같다. 아무튼 집중되었지만 견제받지 않는 권력에 도전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수용소에 갇혀 호르몬 연구 대상이었던 실험쥐 신세였다. 한편으로 뛰어난 정원사였던 그는 실험 덕분에 천재가 되었고 놀라운 육체적 능력까지 얻었다. 혼자 연구소를 폭파하고 혼자 수백명을 죽이고 혼자 영국을 유린한다. 그리고 권력을 추구한 자나 배제된 자들의 비참한 말로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은 어떤 이야기 연관성보다는 파편적으로 보여준다. 즉 개연성은 그다지 없다. 만들어진 신, 브이는 무대감독처럼 모든 등장인물들을 쥐락펴락하면서 가르치고 훈계한다. 보통 셰익스피어나 문장가들의 문구를 읊으면서 말이다.

 

책의 결말은 모호하게 끝난다. 권력층은 제거되고 영국은 혼란에 빠진다. 치명타로서 폭탄이 가득 담긴 열차가 다우닝가를 날려버린다. 과연 영국인들은 다시 사회를 일으켜세울 수 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무언가 새로 세우기 위해 무에서 시작해야한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 무언가는 무수한 개인들이다. 그들은 시스템이 정합성을 가질 때까지 - 통치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 - 지독한 혼란 속에서 최소한의 배급도 없이 어떠한 보호도 없이 방치될 것이다. 동네는 자경단없이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관료들이 유지했던 시스템은 관리자 없이 버려지고 폐기될 것이다. 그러면서 또 무수한 대중들은 그저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읽은 소감은 거대한 규모의 자살극이라고 생각된다. 브이는 더 이상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영국과 함께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거대한 쇼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 결과는 이름모를 이들의 수많은 희생일 것이다.

 

어떠한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이제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한때 나는 여러가지 상상을 많이 했다. 이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내 생각에 개혁은 아래에서 오지 않는다. 변혁은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자가 이끄는 양들이 두려운 존재인 것처럼, 지도자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정말로 시스템을 바꾸고 싶다면 시스템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휩쓸리지 말고 독자적인 행동을 해야한다. 세력화하고 행동해야 한다. 은하영웅전설의 로엔그람처럼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쿠데타를 벌이는 쪽이 낫다는 말이다. 제국을 몽땅 날려버리고 새로운 항성계로 이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확률이 낮고 기약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말은 내게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진다. 독립운동가의 삶은 존경스럽지만 그들의 가족은 어떠했을까. 유관순의 부모는? 안중근의 아들은? 물론 인생은 각자의 것이다. 어쨌든 내게는 슬프게 느껴진다. 어느덧 인생의 중반을 넘어선 내게 사회를 바꿀 힘은 좁쌀만큼이나 될까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내 가족을 위한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자식들을 존중하고 주체적으로 키우기, 누군가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기... 그들이 사회에서 올바로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책무는 다했다고 생각한다. 내 방식의 벤데타. 그런 것들은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걸 위해 오늘도 느슨한 마음을 추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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