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감상문

뉴로맨서

ehei 2011. 3. 14. 23:03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아이디어회관 문고판으로 SF를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고... 세계 명작 문고도 있었다. 다 읽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잡을 생각은 안했던 것 같다. 반면 SF는 그렇지 않았다. 많이 읽은 건 열번도 본 것 같다.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세계에서, 굉장해보이는 기술이 등장하고, 마법이나 다름없는 지식으로 헤쳐나가는 SF 소설이 내게는 정말 흥미있게 다가왔다. 그런 경험 덕인지 여전히 SF는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장르이다. 판타지는 그 반대이고.

 

많이 알다시피 뉴로맨서는 사이버펑크의 효시로 유명한 작품이다. 내가 처음 책을 잡았을 당시에도 책의 뒷면에 그렇게 써있었다. 이번에 읽은 책도 그러했지만. 그 때가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식이 앑아서 그랬을까, 아님 번역이 엉망이었을까. 당시에는 종잡을 수 없는 내용에 어리둥절하다가 지루해하고 그렇게 덮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나도 나이를 먹었으니, 그게 벌써 20년 전일이다. 그러나 지금 읽어도 책의 모든 내용이 이해되는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난해하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다만 사이버펑크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쌓인 덕분인지 그때보다는 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종사하는 직종이 소프트웨어 개발이다 보니, 흥미로운 소재가 여럿 등장한다. ICE(사이버 스페이스 상의 방어 소프트웨어), 심스팀(다른 사람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장치), 구조물(뇌의 사고 패턴이 저장된 장치) 등. 사실 전개는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다. 복잡한 설정에 비해 전개도 좀 단순하고. 아무리 기술이 진보해도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모자란다고 할까. 하긴 소설 내 등장 인물들도 기술은 그저 돈벌이 수단이고, 여가는 마약을 즐기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런 기술적인 진보가 어떤 윤리적인 문제를 발생시킬 지 생각하게 한 점이다. 해킹하는 카우보이들을 뇌사시키고, 죽은 자를 상자 안에 넣어 일을 시킨다... 육체를 대여해서 그 시간에 무슨 짓을 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인간을 복제해서 장난감으로 삼고, 냉동해서 필요할 때마다 녹여 쓴다... 이런 시대면 식인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아마 맛이 없어서겠지만.

 

인간이 존중받지 않는다면, 그 기술을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윤리적인 장벽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미 스스로를 멸종시킬 수 있는 기술이 있다. 이런 시대에 살 바에는 산에 올라가 화전을 일구고 살아가겠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고상하게 죽고 싶은게 내 소망이다. 이 책은 무서운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사고 사례를 보고 경각심을 일깨우듯, 이 책도 그러한 목적에 충분한 쓸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