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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용구

픽사 전시회 포스터를 걸다

by ehei 2014. 3. 29.

 

 

 

 

이전 회사는 급여 체불이란 사건 덕에 끝이 좋지 않았다. 허나 내게. 프로그래머라는 새 경력을 시작할 기회를 준데다가 나름 장점도 많았다. 그 중에 하나는 한달에 한번 있던 문화 행사였다. 대부분은 영화였지만 가끔 전시회를 고를 수 있었다. 픽사 20주년 전시회는 순전히 그 덕에 갈 수 있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했었는데 그 당시 내 전화기는 구형 애니콜이어서 몰래 촬영할 엄두도 못냈다. 도둑 촬영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근사한 작품들이 많았다. 픽사는 상업 예술의 정점에 오른 자들이 모인 만큼 전시회 작품 수준이 남달랐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내가 처음 공중파에 나간 경험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자정에 하는 프로그램이었고 내 용모도 보잘 것 없었지만 당시 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당당히 인터뷰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니 멋졌다는 기억 외에는 죄다 퇴색해버렸다. 아마 전시회에서 산 두 장의 포스터가 아니었다면 그 기억 또한 휘발되었겠지만. 당시 나는 돈 쓰는 것에 벌벌 떨었다. 그런 내게 장당 만원은 큰 돈이었다. 허나 무슨 생각이었을까. 두 장을 가지고 있다. 카와 라따뚜이를 그린 두 장. 지금 어렴풋이 드는 생각으로는 나중에 집을 사면 기념으로 걸어야지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쉽고 기쁘고 바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그런 날이 왔다. 이사를 하다가 잊었던 보물을 발견했다. 나는 별 생각없이 표구해서 걸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그녀가 나섰다. 직접 액자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녀는 인터넷을 수소문해서 필요한 자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내 동생에게 전동 공구도 빌렸다. 하나둘 부품이 모이더니 그것이 하나로 되었다. 제법 근사한 액자 둘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시행 착오도 있었다. 액자 테두리의 경도가 낮아서 휘어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허나 참신한 해결법이 나왔다. 고리를 상단이 아닌 측면부에 달기로 했다. 성공이었다. 틀을 고정시키려 목공 본드에 가구용 호치키스도 샀지만 글루곤만한 건 없었다.


휴일이 오고 다는 날이 되었다. 벽에 전동 공구로 구멍을 뚫는데 이리 어려운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가 이리 단단한 줄이야. 게다가 나의 근력과 지구력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원래 쓰려던 7cm 가량의 나사못을 쓰기 위한 구멍을 뚫을 수 없었다. 심지어 드릴 하나가 망가지기까지 했다. 아쉽지만 3cm 짜리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근사했다. 오랜 꿈이 이뤄지는 날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당시 라따뚜이 포스터를 살 적에는 쥐 두 마리가 남녀 한쌍인 줄 알았다.  그건 내 대단한 착각이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좋다. 아버지는 가셨지만 내겐 좋은 동생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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