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작업이 워낙 긴장도있게 진행되서 심신이 많이 지쳤다. 나는 나름 사이클 관리에 신경을 썼는데도, 한번 틀어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높은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버틴 건 내 자신에게 즐거운 경험이었다. 프로그래머가 되려고 공부하던 그
때가 생각난다. 주 6일은 꼭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학교에서 매고 간 노트북으로 공부했던 때. 허나 이 팀에는 스태미너와 끈기가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나 정도는 새발의 피. 그래도 작업 후에는 모두 힘들었고, 그로 인한 휴유증을 풀어주고자 제주도 워크샵이
계획되었다. 예전 회사에서도 갔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날씨가 쌀쌀한 탓에 야외 활동을 즐길 만하지는 않았다.
출발은 8월 30일. 2박 3일 일정이다. 흥미롭게도 출발 즈음에 강한 태풍이 남쪽에서 올라왔다. 그게 지나고 출발 전날 꼬마
태풍이 서해를 지났다. 많은 비가 예보되었다. 출발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다. 어쨌든 당일에 아무 연락도 없었으므로 약속
장소인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집합 시간은 3시였는데 한 시간 전에 도착해버렸다. 남는 시간을 떼우고자 이마트에 가서 장난감을
둘러봤다. 토이저러스 만큼은 아니지만 매장이 커서 별별 종류가 많다. 시간이 임박해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팀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미리 도착한 사람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더니 웬일. 이제보니 출발 조가 셋으로 나누어있고 시간이 각각
달랐다. 나는 아직도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이런 때를 대비해 책을 가져갔다.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를 읽다보니 탑승
시각이 되었다. 신혼여행 후 처음 타는 비행기였다. 이른바 저가 항공. 항공료가 정말 저렴했다. 고속버스보다 훨씬 빠르면서 싸다.
기술과 서비스의 진보에 감탄하면서 이륙에 대비했다. 상승하면서 기류를 체감하자 기분이 바뀌었다. 비행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탓인지
마침 불어온 태풍의 영향 탓인지 모르겠다. 길지는 않았지만 롤러코스터를 방불케하는 진동과 스릴이 느껴졌다. 기내 서비스로 제공된
감귤 쥬스를 엎을 뻔 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금방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태풍이 지나간 제주도는 유난히 화창했다.

워크샵에 대략 30여명이 넘는 팀 전원이 참가했다. 스타렉스 세 대에 나눠타고 저녁 식사를 위해 갔다. 중문 관광 단지까지 갔으니 꽤
시간이 걸렸다. 내가 탄 차 안에서 조장의 제안으로 모두 자기 소개를 했다.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무엇보다 띠동갑나는 사람까지
있었다. 사실 이제 중년이니 놀랄 일도 아니다. 지나간 세월을 느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해서도. 그 모든 건 나의 선택이
좌우한다.
1시간 가까이 지나서 갈치조림 가게에 도착했다. 안은 다녀갔던 사람들의 방명록으로 가득했다.
맛집이라니 그럴만도 하다. 조림의 양념은 맛깔있고 갈치 또한 살이 많아 먹기 좋았다. 시장기까지 겹치니 입에 넣기 바빴다. 다만
식을수록 짠 맛이 강해지고 비린 맛은 살아났다. 차림표를 보았다. 귤막걸리가 있었다. 맛이 궁금해서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식사 때 술을 시켜도 될지 몰라 망설였다. 확실히 여기에 오면서 내 마음은 위축된 상태다. 이전 회사였다면 절대로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는 용기가 지나쳤다고 해야할까. 공자님 말씀대로 중용이 제일 어렵다. 내 기분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나보다. 그가 술을 시켰다. 새콤한 귤맛이 가득했다. 곡주보다는 숙성한 과실주 같았다.
식사도 하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밤하늘은 별이 촘촘했다. 그 중에서도 북극성은 유난히도 빛났다. 고대 시대부터 이정표 역할을 했다는 별 다왔다. 숙소로 출발했다. 그리 가깝지는 않았지만, 식당 가는 길보다는 짧았다.

분위기는 훌륭했다. 잘 가꿔진 잔디밭에 옥외 수영장까지 갖춰있다. 방에 들어가니 넓고 아늑했다. 설비도 훌륭했다. 짐을 풀고 조금
쉬니 열한시에 이르렀다. 워크샵인 만큼 간단한 그러나 한 시간이 넘는 프로젝트 소개와 방향을 실질적인 디렉터가 진행했다. 그는
대단한 인물로 게임의 모든 측면을 책임지고 있다. 제갈량같은 인물이라고 할까. 아마 그가 없으면 프로젝트는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배
신세가 될 터이다. 내용은 충분히 공감되었고 가능성도 재확인하게 되었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걱정되는 점이다.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식사 당번을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조에서 한명씩 나와 승부를 하고 진 사람은 빠진다. 조의 모든
사람이 지면 당번이 된다. 내가 속한 조는 한판도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 하지만 마지막 사람인 내가 계속 이기거나 비겼다.
덕분에 당번이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일어나니 몸이 뻐근했지만 그리
피곤하진 않았다. 이것이 좋은 공기의 혜택인가. 식탁에는 당번들이 차려놓은 토스트와 카레밥이 있었다. 그리고 컵라면도 몇개
놓여있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매월 간식이란 명목으로 과자와 라면을 어느정도 구매했다.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먹었다. 이제는
승희가 못 먹게하니 그럴 기회가 없다. 그래서 기꺼이 컵라면을 택했다. 너구리 라면의 풍미는 얼핏 같았으나 젓가락질을 할 수록
냄비에 넣고 끓인 쪽이 좋다. 이제 화장실에 가야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몹시 붐볐다. 실내에는 화장실이 넷 있다. 둘은 여사우가
쓴다. 나머지로 씻고 용변을 보려니 스물닷명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게다가 난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다. 계속되는 노크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밖으로 향했다. 적당히 으슥한 곳이라도 있으면 실례를 무릅쓸 마음이었다. 뒷마당은
도저히 그럴 곳이 없었다. 철망 너머로는 감귤 나무에 농약을 치는 농부가 있었다. 이제 실외 화장실을 찾아야했다. 수영장 건너편에
있었다. 안은 좁은데다가 모기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전에 관리인이 살포식 살충제를 뿌렸다. 매캐한 연기에도 제주도 모기들은
건강했다. 그 외에는 방해받지 않고 볼일을 마칠 수 있었다.
원래 오전에는 카약을 탈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날 워크샵이 늦게 끝나고 여행에 대한 피로도 겹쳤는지 대부분 늦잠을 잤다. 오후 계획인 카트와 ATV 타기가 대신
이뤄졌다. 제주도까지 와서 왜 이런 걸을 탈까 할지도 모르겠다. 그저 제주 공기를 마시려고 온 건 아닐테지만, 멀리 가보는 것도
좋은 긴장 해소책이리라. 나만 해도 제주에 있는 동안 한결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경제적 기반을 잡는 게 어렵겠지만
가끔 훌훌 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처음 타본 카트는 꽤 재미있었다. 꺼질듯이 들리는 엔진의 거친 소음과 노면에
바싹 붙어 질주하니 느린 속도로도 운전의 재미를 꽤나 느꼈다. 주행 거리를 최대로 하려고 도로 바깥쪽으로 최대한 붙여 운전했다.
카트를 마치고 조금 기다리니 ATV를 탈 차례가 왔다. 강력한 엔진을 이용해서 험로를 주행한다. 선두의 안내인이 인도하는 경로만 갈
수 있었다. 나는 후미에 있었다. 꽤 재밌어서 가능한 험로를 주행했다. 일부러 진창으로 돌진한다든지, 바위로 달려드는 일
등이다. 온몸에 전해지는 노면의 느낌이 흥겨웠다. 이런 재미에 자동차 서스펜스를 딱딱하게 하나보다. 다 타고나니 아끼는 바지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 내린 후에는 물로 씻어내려 했다. 진흙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점심 때가
되었다. 여러 후보 중에 게짬뽕이 선정됐다. 서귀포 시에 있는 중국집에 도착했다. 인원이 많아서 음식이 마련되는데 꽤나 시간이
들었다. 찹쌀 탕수육과 라조기같은 요리가 먼저 나왔다. 방금 해서인지 따뜻하고 쫄깃한 것이 좋았다. 실은 식사 때가 지난 후라
무척 배고팠다. 요리가 비워질 때쯤 짬뽕이 나왔다. 게 한 마리와 우동 면발과 얼큰한 국물. 요리가 어느 정도 달래줬지만 여전히
배는 고팠다. 사실 게는 먹기 불편하고 살도 적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살을 발라서 수저에 얹어주던 시절에나
좋아했지... 열심히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 편에서도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놀리고 있다. 한 사람은 해산물 알러지가 있다고
한다. 다른 이는 해수 알러지라고 한다. 햇빛 알러지라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나도 뭔가 먹으면 몸에 수포처럼 올라오고 반점이
여기저기 생긴다. 그런데 그게 아직도 뭔지 모른다.

워크샵 일정 중 마지막 장소에 들릴 차례가 되었다.
중문 해수욕장이다. 확실히 8월 말일이라 사람이 적다. 하지만 해는 여전히 따갑고 물은 시원함이 느껴진다.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하는 여성들도 보였다. 물놀이 차림인 사람이든 아니든 들어가서 즐기고 있었다. 동료들도 시원한 물 속에 들어가 높은 파도와
부딪히며 놀았다. 나는 해변을 걷기만 했다. 샤워하기도 싫고 곧 이어질 휴가 때 그럴 시간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내일
정오에 서울로 떠난다. 나는 이대로 수요일까지 머문다. 이제 숙소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일부는 저녁 회식 준비를 위해 이마트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피곤했다. 그러나 곧 저녁 준비팀이 돌아왔다. 고기와 술을 잔뜩 사가지고.
이가 아플 정도로 고기를 씹고 맥주를 마셨다. 이야기를 잔뜩 나눴다. 싼 값에 터키를 일주일 간 여행한 것, 회사에서 보내준 안식
휴가로 지중해로 간 것, 예전에 만든 게임의 비하인드 스토리, 회사에 입사하게 된 계기, 나의 신혼 여행 이야기 등등. 밤은
깊어지고 모기들은 극성이었다. 파티는 끝나고 일부는 잔디밭에서 배구를 하고 일부는 실내에 들어왔다. 보드 게임에 끼고 싶었는데
좁은 방은 이미 만원이었다. 누가 늑대인지 찾는 게임인 듯 하다.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고 나머지는 앉아서 고개를 숙이거나
누구를 지명했다. 어쨌든 포기하고 앞으로의 휴가를 위해 수면을 취하기로 했다. 익숙치 않은 장소에다가 잘 씻지도 못해서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도 내일은 숙소에서 여유있게 샤워할 수 있겠지. 잠을 청했다.
일찍 일어난 줄
알았더니 이미 9시였다. 우유와 천도복숭아로 아침을 해결했다. 숙소 정리 중에 나온 뜯지 않은 김치와 남은 과일을 챙겼다. 카레나
통조림은 자취하는 분들이 가져갔다. 마지막 일정은 점심 식사였다. 삼분의 이 가량은 회를, 남은 이는 해물탕을 먹으러 갈
예정이었다. 나는 뜨끈하고 시원한 국물을 맛보고 싶어서 해물탕을 원했다. 도착한 곳은 소문난 맛집이라고 한다. 갖은 해물이 잔뜩
담긴 것이 맛이 좋았다.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나오니 주변에도 해물탕 집이 여러 곳 있었다. 신기하게 방금 나온 곳만 손님이
줄을 서고 있다. 다른 곳은 문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비어있었다. 이래서 뜨내기 손님이라도 무시하면 안된다는 걸 느꼈다. 가게에
사람이 있어야 메뉴를 시험할 용기가 나기 마련이다. 몇몇 분들이 선물로 감귤 초콜릿을 사고 나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도착하니
렌트카 대여 시간이 코앞이다.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인사를 하고 렌트카 창구로 향했다. 이렇게 워크샵 일정은 끝이 났다. 내
휴가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