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맑음
회사에서 편의를 봐준 덕에 워크샵이 끝난 후에 바로 휴가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2박 3일의 워크샵이 끝나고 제주 공항에서 서울로 떠나는 사우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무지개 렌터카 부스에 갔다. 미리 예약을 해둬서 차만 찾으면 된다. 예약 없이 자리에서 빌리는 이도 꽤 있었다. 차종은 아반떼이다. 사실 레이로 하고 싶었다. 앞으로 차를 산다면 후보로 꼽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예약을 했지만, 업체측에서 취소를 해왔다. 대신 권한 차종이 아반떼였다. 차를 빌리고 조금 기다리니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 또한 제주 땅을 밟고 있는 것이다. 마중을 나가 만났다. 계획은 바로 숙소로 떠나는 것. 워크샵의 피로를 덜고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오늘은 푹 쉬기로 했다. 확실히 서울보다 신선한 공기를 느낀다. 하늘도 좀더 푸르른 듯 싶다. 우리는 숙소 두 군데를 잡고 각각 2박 3일씩 하기로 했다. 처음은 동쪽, 다음은 서쪽이다.
제주시를 빠져나가니 좁지만 한적한 도로가 펼쳐진다. 양 옆에는 농지나 숲이 보인다. 저멀리 풍차 날개가 한가로이 돌아가는 것도 보인다. 하늘은 높고 맑고 구름 몇 점이 전부다. 가끔 태풍의 휴유증이 보였다. 몇몇 신호등은 제 기능을 못하고 넘어져있다. 그러나 통행에는 영향이 없다. 제주는 교통 신호가 단순하다. 로터리가 많을 뿐더러 제주 시를 떠난 후에는 사거리에 신호등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제는 운전이 정말 쉬워졌다. 네비게이션은 길을 잃을 염려를 없애버렸다. 이 장치가 있어도 방향을 종종 잘못 꺾어서 엄한 곳으로 가기도 했다. 이제는 익숙해졌고 안내판도 주시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좀처럼 없다. 지시를 따라가니 저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땅에서 불쑥 튀어나온 신기한 모습이다. 이렇게 첫번째 숙소인 해맞이 콘도에 도착했다. 성수기가 지난 탓인지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주인도 어디 갔는지 얼마간을 기다려야 했다. 열쇠를 받아들고 문을 여니 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그 점을 빼놓고는 허름한 방이었다. 구석구석 지난 손님들이 남겨놓은 흔적이 보인다. 놀란 점은 옷걸이에 걸어놓은 무언가 때문이었다. 누군가 낡고 늘어난 여성 속옷을 놓고 갔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우리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워크샵 기간 동안 못했던 샤워를 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느긋하게 천도 복숭아를 먹으니 더욱 좋았다. 저녁이 되자 세탁소도 갈 겸 식료품도 살 겸 외출했다. 성수기가 지난 휴가지는 몹시 한가로왔다. ATV를 타면서 온통 진흙이 튄 바지를 맡겼다. 다음 날 일출봉에 오르기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9월 2일, 맑음
피로가 쌓인 탓일까. 일어나니 열시가 넘었다. 일출은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우도이다. 차를 타고 인근에 있는 우도 항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항구는 몹시 북적였다. 창구에서 왕복 배표를 샀다. 짬이 나서 수협에서 선물로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감귤 초콜릿을 제외하면 살 것이 마땅치 않았다. 집에 있는 조기 몇 마리가 몇 개월째 냉동실에 처박혀있는지 모른다. 아침에 구워먹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 정도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되어 배에 올랐다. 예전에 서해 섬을 돌 때와 비슷한 배였다. 옆에 근사한 배가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어서 안타까웠다. 우도는 제주도와 매우 가깝다. 십여분 남짓 가니 섬이 보였다. 곧 선착장에 도착했다. 항구 초입은 인파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섬을 유람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ATV를 빌려 타기. 개인 버스를 타기. 마지막으로 도보. 개인 버스는 일일 자유이용권을 사고 아무 버스나 타는 식이다. 편리하지만 배차 시간이 길다. 어쨌든 버스표를 샀다. 첫번째 목적지는 우도 등대로 가는 길이다. 돌담으로 둘러싼 집 사이사이를 큰 버스가 잘도 지나간다. 기사는 말재주가 좋았다. 그가 소개하는 우도 이야기는 만담을 듣는 것 마냥 즐거웠다. 내리니 넓은 구릉이 펼쳐져있다. 한편에는 말들이 사람을 태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생수를 하나 사고 울타리를 따라 걸었다. 가끔 경사가 험했지만 걷기 좋게 밧줄로 짠 깔개같은 것이 있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체력이 약해서인가. 등대에 가까이 오르니 숨이 헐떡였다. 옆으로 보이는 절벽으로 파도가 치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등대가 지척에 보이는 곳까지 올랐다. 웬일. 거기로 가는 길은 문으로 닫혀 있었다. 앞으로는 더 갈 수 없어 내려갔다. 오솔길이 보였다. 표지판에 등대로 가는 길이라고 써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을까. 총총히 밑으로 내려가기에 바쁘다. 등대로 향하기로 했다. 아까와는 달리 인적이 드물다. 가는 길은 라디오 소리가 흘려 나온다. 제법 땀이 났기에 벤치에서 쉬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길은 걷기 편하게 가꿔있다. 드문드문 여러 등대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휴식을 끝내고 등대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오르니 등대가 보였다. 안은 전시관으로 꾸며져있다. 등대의 작동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 있다. 작은 상영관도 있는데 지금은 불이 꺼져 있다. 등대 주변은 온통 푸르른 바다 뿐이다. 서늘할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한편으로 인근 바다에는 물보라를 가르는 보트가 내달린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열리는 광경이다. 휴가의 의미를 찾는 순간이다. 아버지에게 이걸 보여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의 여행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후회해도 소용없고 그저 마음만 아플 뿐이다.
우리는 이대로 둘레를 따라 걷기로 했다. 우도는 분지처럼 평지를 나지막한 언덕이 둘러싸고 있다. 반대편으로는 바다가 펼쳐져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즐거웠다. 머리 속을 샤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꽤 오래 걸었다. 섬에 있는 해수욕장까지 가기위해 버스를 타야 했다. 특산물이라는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숨을 돌렸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기사는 달랐지만 입담은 여전했다. 어느 민박집은 부부가 자면 아들이 생긴다고 한다. 최근에는 정말 자식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솔깃한 이야기였다. 내가 세상에 없다면 그녀는 너무나 힘들 것이다. 우리 둘은 서로를 너무나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닮은 사랑의 결실이 있다면... 상상하기 싫은 일을 견디기에 좀 더 낫지 않을까.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정말 작은 모래톱이었다. 너무나 좋은 날씨에 아담한 모래밭에 선다. 때마다 들어오는 파도에 발이 젖는 느낌이 좋다. 주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가 적어 속닥대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린다. 수영복을 가져왔지만 해수욕장은 폐장된 상태였다. 어차피 가는 길에 섭지코지에 들릴 생각이었다. 푸른 하늘에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즐겼다. 배를 탄 때가 정오였는데 벌써 세시가 넘었다. 해수욕도 해야하니 더 지체해서는 안되었다. 낮에는 더할나위 없지만 밤에는 그야말로 초가을 날씨이다.
항구로 가는 버스는 승객이 많았다. 한대를 보내고서야 탔다. 도착지에 내리니 운 좋게도 여객선이 도착해있었다. 선실은 피로를 달래는 이들로 북적였다. 우리도 자리를 골라잡아 쉬었다. 조금 뒤 배가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제 섭지코지에 갈 차례이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도착했다. 해변은 무척 넓었다. 해수욕을 즐기다 방금 떠나는 외국인 몇을 빼니 단둘이 있었다. 해가 넘어가는 중이라 그런지 우도에서와는 달리 물은 차가왔다. 그녀는 온도가 괜찮다며 몸을 담그고 헤엄을 쳤다. 한참이나 몸에 물을 마찰하니 적응이 되었다.
담그고 조금 있으니 물 안이 오히려 따뜻했다. 헤엄을 못 치지만 몸에 감기는 바닷물을 개헤엄쳤다. 우리는 교대로 물장구를 칠 수 있도록 서로를 이끌어줬다. 그녀는 몸이 잘 떴지만, 나는 좀처럼 뜨질 않아 바닷물을 몇 모금 마셨다. 방파제 안에 있어서 파도는 잠잠했다. 한 시간 가량 놀다보니 연인으로 보이는 한쌍이 저멀리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수영을 못하고 물에서 허우적대는 건 좀 심심한 일이었다. 한적해서 좋지만 분위기는 쉽게 지루해졌다. 무엇보다 해가 저무는 속도에 맞춰 쌀쌀함이 더해졌다. 나름 알찬 하루를 보냈으니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도 샤워장은 닫혀 있었다. 숙소에 가서 씻기로 하고, 모래 범벅인 발에 물을 끼얹었다. 물에서 나오니 점점 추워진다. 즉석 카레밥을 먹고 잠을 청했다. 내일은 정말 일찍 일어나야한다. 일출을 봐야하니까.
9월 3일, 맑음
다행히 일찍 일어났다. 창 밖을 보니 한적한 도로로 드문드문 차량이 지나갔다. 저멀리 편의점 불빛이 보일 뿐 고요한 새벽이다. 부인을 깨워 나갈 차비를 했다. 나가니 일출봉을 오르는 길이 반짝이는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매표소에서 요금을 치르고 걸었다. 공복인 상태에서 걸어서 그럴까. 아니면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일까. 걷는 길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리 높지도 않은데 자주 쉬었다. 다른 일행들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걸음을 계속했다. 어느덧 계단의 끝이 보였다. 올라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트는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빈 자리를 찾아 구석으로 갔다. 잡담을 하며 기다렸다. 마침내 구름으로 가득한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눈부시도록 밝은 귤 색깔의 빛이 새어나왔다. 그 광경에 놀라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해가 금새 떠서 천지가 밝아졌다. 점점 빛이 강해서 쳐다보기 힘들어졌다. 그 동안 우리는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금새 잊혀질 소망을 빌었다.
일출봉에서 한 시간쯤 있자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경치는 좋았지만 압도적인 풍광은 아니었다. 해도 어느 정도 뜨니 그저그런 하루의 반복일 뿐이었다. 길을 내려갔다. 아까 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길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해안 도로를 따라 정방, 천지연 폭포를 보고 도깨비 도로를 지나 다음 숙소인 파인힐 리조트로 가기로 했다. 식사를 일찌감치 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 날씨도 훌륭했다. 밤에는 싸늘했지만 낮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따사롭고 화창했다.
첫번째 목적지는 정방 폭포이다. 부인은 일전에 가봤지만 천지연 폭포 인근이어서 가기로 했다. 그녀는 20대에 홀로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했다. 한라산도 등반했던 그녀이다. 그다지 볼 건 없지만 들러보자고 했다. 한참을 운전한 끝에 도착했다. 그런데 관광은 금지되어 있었다. 태풍으로 인해 일부 구조물이 부숴졌다고 한다. 막힌 입구 근처에서 저멀리 보이는 폭포를 배경 삼아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거기에 끼어들어 사진을 찍었다. 폭포는 제법 멋졌지만 오천원 가량의 입장료를 낼만한지는 의문이었다. 망에 담긴 귤을 사서 까먹었다. 아직 귤이 나오려면 몇 개월 있어야한다. 귤 맛을 본지 오랜지라 무척 맛있었다.
다음 목표인 천지연 폭포는 가까이 있었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복잡한 진입로를 따라 갔다. 많은 차가 주차해있고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표를 사러 창구에 갔는데 파는 사람이 없었다. 살펴보니 세계 자연 보존 총회 기념으로 몇 군데 관광지가 무료였다. 이곳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향했다. 주변에서 연신 중국어가 들려온다. 폭포로 가는 길은 잘 정돈되어 청계천을 걷는 듯 했다. 그 만큼 자연에서 멀어진 듯 싶지만 어쩌랴. 십여분을 걸으니 저만치 시끄러운 물소리와 함께 폭포가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속이 트이는 듯 멋졌다. 그런데 난 왜 다큐멘터리에서 본 나이아가라 생각이 자꾸 나는지. 아무튼 아담하고 이쁜 폭포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찍을 자리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천지연이란 푯말 앞에는 줄을 서서 촬영 중이었다. 우리는 가장자리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사진을 찍었다.
이제 도깨비 도로에 갈 차례이다. 그곳은 착시 현상으로 인해 경사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은 꽤나 멀었지만 숙소로 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가는 중에 법정사라는 절을 보았다. 들러보기로 했다.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멈췄다. 한적한 곳이었다. 몇 대의 차가 서 있지만 인적은 없었다. 길을 걸었다. 양쪽으로 잘 가꿔진 숲이 있다. 숨쉬기가 너무 즐거웠다. 우리에게 원치 않는 동료가 생겼다. 작은 개가 우리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그녀는 개를 몹시 무서워한다. 엘레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애완견조차 피하려고 애쓴다. 어느 정도 걸었더니 그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앞에 갈림길이 보였다. 왼편은 휴양림, 오른쪽은 전망대, 쭉 가면 법정사 터와 기념비가 있다고 표지판이 말해준다. 전망대로 가보았다. 숲이 드리운 그늘 너머로 너무나 따사로운 햇빛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밑에는 초록이 선명하고 빽빽한 숲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티없이 맑은 하늘과 합쳐지니 마음은 쉴 자리를 찾아 마구 커지는 것 같았다. 여행의 맛을 본 듯 했다. 이런 느낌을 찾아 여행을 계속하는 것인가. 집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우리는 한껏 사진을 찍었다.
벤치에서 조금 쉬면서 남은 귤을 먹어치웠다. 기념비 쪽으로 가보았다. 삼일 운동 때 이곳에서도 호응이 있었다고 한다. 그 댓가로 절은 불타고 있던 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내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평화와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다시 느꼈다. 하루 하루에 치여 그저 내게 닥친 일을 마주 하느냐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지만. 우리는 휴양림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판자로 된 구름다리가 길게 뻗어있다. 숲은 적막한 가운데 까마귀 소리만 요란했다. 묘하게 무서운 느낌을 줬다. 제주 올레길에서 벌어졌던 흉흉한 일이 생각났다. 꽤 긴 듯 했지만 종점에 왔다. 문이 있고 그 너머에는 돌이 가득한 건천이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메아리로 들려왔다. 인적도 없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질린 터라 되돌아가기로 했다. 모습도 없이 여전히 들려오는 까마귀 소리가 거슬렸다.
입구쪽으로 내려가니 아까 본 개 말고 한 마리가 더 있었다. 그 개는 덩치도 훨씬 크고 사납게 생겼다.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목줄도 없었다. 그녀는 무서웠던지 재빨리 벤치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개를 피하기 위해 소용없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개는 관심을 잃은 듯 다른 곳으로 떠났다. 차를 타고 다시 도깨비 도로로 향했다.
가는 도중 서귀포 휴양림을 보았다. 이전에 썼던대로 행사 관계로 무료 입장인 만큼 들러보기로 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려 했는데 주차료를 내야한다고 했다. 입장료와 별도라고 했다. 어쩐지 속은 기분이었지만 들어가보기로 했다. 어쩐지 입구 훨씬 전에 주차한 차량이 많다 했더니... 직원이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좋다고 말해줬다. 그러나 법정사에서 걷던 길의 인상이 짙게 남아있던 탓일까.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나무가 많았지만 밀도는 덜하고 무엇보다 인근을 지나는 차량 소음이 연신 들려왔다.
한참을 달려 도착했다. 보기보다 무척 초라해보였다. 버스에 앉은 노인이 이게 뭐냐고 묻는 듯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안내문처럼 시동을 끄고 가만히 굴러가게 내버려 봤다. 두 차례인가 해봤는데 잘 되지 않았다. 아마 시도를 잘못 하는 것이겠지만 흥미가 없어졌다. 이제 많은 시간이 지났으므로 숙소로 가기로 했다.
목적지인 파인힐 리조트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시간이 들었다. 목적지를 분명히 찍었는데도 웬 관청으로 자꾸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숙소에 전화하니 특정 기종의 네비게이션에 지도가 잘못되어 있다고 했다. 자신들도 한두번 이런 전화를 받는게 아니라 한다. 번지를 찍어서 가니 그나마 제대로 목적지를 잡을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고 3층의 아담한 숙소였다. 입실하니 생각보다 방이 컸다. 이전 숙소는 너무 좁았다. 편의시설도 TV가 전부였고. 여기는 컴퓨터도 있다. 오늘은 이곳저곳 충분히 관광을 했다. 편안히 쉬기로 했다. 케이블 방송에서 내보내는 도라에몽 극장판을 보면서 컴퓨터에 깔려있는 온갖 잡다한 프로그램을 제거했다. 저녁에는 나가 선물로 귤한잔이란 술을 샀다. 제주도에서 판매되는 제품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마트에서도 잘만 팔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9월 4일, 맑다가 흐림
간단히 식사를 하고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협재 해수욕장에 가기로 했다. 원래는 근처의 항구로 가서 하루에 2번만 배가 있는 섬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무 여유를 부렸다. 약간의 늑장 덕에 배 시간이 지나버렸다. 햇볕은 몹시 따가왔다. 우리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바닷물이 제법 따뜻하리라 생각하고 수영을 하기로 했다. 들어가보니 충분히 덥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연신 몸에 물을 끼얹으며 마사지를 한참 한 끝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해변에 제법 사람도 많았지만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지 거닐기만 할 뿐이었다. 모래찜질도 하고 물장구도 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없더니 나가려고 하자 한 커플이 큰 튜브를 가져와서 놀았다.
섬을 거닐기로 한 일정이 깨지자 한가해졌다. 조금 멀지만 설록 차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그곳에는 제주 공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인파를 볼 수 있었다. 박물관의 내부 장식은 훌륭했지만 생각보다 작아 구경꺼리가 적었다. 대신 넓다란 차밭을 거니는 것이 이 곳의 진수인 것 같았다. 카페 안에서 녹차 라떼와 녹차 롤케익을 먹고 차밭을 산책했다. 많은 사진을 이곳에서 찍었다.
유감스럽게도 하늘에 구름이 끼어가고 있었다.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이곳을 지겹게 봤는데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도중에 유료 공원 몇 군데를 살펴봤다. 볼거리에 비해 요금이 비싼 듯 싶어 지나쳤다. 대신 제주 현대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이곳도 총회 덕분에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곳이었다. 게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위치하기도 했다. 도착하니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앞에서 천막을 펴놓고 행사를 하고 있었지만 너무 사람이 적은 탓인지 고요했다. 엄숙한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미술관답게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사물이 곳곳에 있었다. 입구에는 사람처럼 생긴 큰 조형물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원이 짧은 주의사항을 들려줬다. 실내에는 우리와 안내원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미술 작품을 감상하며 무딘 내 가슴에도 파도가 잔잔이 밀려왔다. 주체는 사람의 마음. 그걸 움직이려면 감성을 가져야한다. 그림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밖을 나오니 몇몇 외국인들과 관광객이 보였다. 우리는 그냥 거닐기로 했다. 미술관 옆은 예술인 마을과 붙어 있었다. 마을은 개성있는 집들로 이뤄져있었다. 현대적 감각이 넘치는 집 옆에 대감이 살듯할 으리으리한 한옥집이 있었다. 하나같이 넓은 집에 큰 마당을 갖고 있었다. 부러운 광경이었다. 부인이 지인 하나도 남편이 뒷바라지해서 화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농으로 너 또한 예술로 보내야겠다고 했다. 여기도 태풍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높다란 기둥 중간이 부러져 있었다.
이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몇 장의 사진을 서둘러 찍고 떠나기로 했다. 마을로 꽤 많이 들어온 탓인지 가는 길은 멀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이 되었다. 컴퓨터로 예술인 마을에 대해 알아봤다. 읽고 나니 더 부러운 기분이 들었다.
9월 5일, 약간 비
아침이 밝았다.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대충 해결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쭉 제주공항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래도 제법 시간이 남았길래 관광지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늘은 흐리고 파도가 높았다. 이제 더는 해수욕을 할 날씨가 아니었다. 요행히 끄트막에 걸친 덕에 휴가를 만끽할 수 있었다. 공항 가까이있는 해수욕장을 들렀다. 아침에다가 날씨도 나빠서인지 아무도 없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제주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렌트카 시간이 넉넉히 남은데다가 기름도 제법 많이 남았다.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차량을 반납하는 절차는 간단했다. 짧은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을 둘러봤다. 얼마간 기다리자 탑승 시각이 되었다. 출발할 때 가늘게 비가 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짧은 비행이 곧 끝나고 서울에 도착했다. 날씨는 놀랍게도 좋았다. 쾌청한 날씨를 보니 기분이 들떴다. 즐거운 휴가였다. 처음도 끝도. 기억은 희미해지겠지만 좋은 느낌이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