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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끄적

첫 장난감

by ehei 2013. 1. 21.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름 다짐한 게 있지.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투자를 해야겠다는 것. 그 동안 나는 손익 매기기에 바빠 그런 것은 그냥 무시하고 살았어. 컴퓨터 게임은 즐겨도, 장난감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어. 이런 것은 해봤자 공간만 차지하고 결국 쓰레기통에 굴러 들어가게 될꺼라고 말이야.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쓰레기통에 갈 때 가더라도 그 때까지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소임은 다 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 내 생각이 짧았던거야.

 

장모님이 손자 옷을 샀는데 오래 입을 걸 보시다가 너무 큰 걸 사셨어. 5살 짜리가 입을 껀데 내 부인한테도 맞을 정도니 말 다했지. 다행히 크기는 교환이 된다고 해서 남대문 시장에 갔지. 집에 오는 김에 동대문 완구 문구 도매시장에 들렀어. 드디어 벼르고 벼른 블럭 완구를 살 시간이 온거야.

 

그래도 자원의 투입에 효율성을 따지는 건 당연한 거겠지? 당연히 블럭 완구의 대명사는 레고지. 품질도 우수하고 탐나는 제품도 많아. 그러나 가격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더군. 매니아쯤 되면 몇 백만원짜리 제품을 사는 건 당연하게 되나봐. 그리고 아크릴 케이스에 넣어 구경꺼리로 삼는거지. 너무 비싼 제품이니 귀중히 해야하는 건 당연하겠지. 어쨌거나 자린고비가 굴비를 매달아 놓는 것과 뭐가 다를까. 다행히 대체재가 있더군. 바로 옥스포드 블럭이야. 품질도 무난하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해. 국산이란 점도 좋아. 몇몇 사람들은 자국 산업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지. 나도 그랬어. 다행히 장하준 씨가 글로 쓴 가르침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지. 어쨌거나 중국제보다는 훨씬 비싸. 그러나 승진완구에서 본 중국산은 너무나 조악하더군. 품질을 떠나서 통짜 블럭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야. 그저 블럭을 꽂을 수 있는 곳이 있을 뿐이야. 이건 블럭 완구라고 할 수 없지.

 

승진 완구 이야기를 해야겠군. 거기서 정말 행복했었어. 엄청난 수의 장난감 속에서 실컷 눈이 호강했지. 생명의 기쁨까지 느꼈다면 괜한 호들갑일까. 절로 기분이 들뜨고 어릴 적 느꼈던 행복감이 연상되면서 머리 속의 안개가 훅 거치는 느낌이 들었어. 맑은 느낌. 옥스포드 블럭을 들고 나오는 기분은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을 날아갈 듯한 거였지.

 

 

이 제품에는 의무 차량, 수송 차량, 전차가 들어있어. 처음에는 의무차부터 만들었어. 이건 부인이 만들었지. 그녀도 신나보였어. 그녀의 집은 어릴 적에 가난해서 그 흔한 인형도 만져본 기억이 없대. 나는 내가 들어가도 훨씬 남는 큰 바구니에 장난감을 가득 쌓아놓고 놀았지... 동생에게는 바퀴 빠진 차량이나 주면서 말야. 그런데 왜 부모님은 그런 나를 방관했을까? 어쨌거나 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해보자고, 상자를 보면서 포탑을 조립해봤지. 도저히 못하겠더군. 블럭을 어떻게 응용하는지를 상상할 수가 없는거야. 완성된 차량은 생각보다 놀랍더군. 꽤 정교해. 블럭 완구지만 어른이 갖고 놀아도 손색 없는 수준이야.

 

 

나는 전차를 만들었지. 이 패키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지. 엄청나게 복잡하더군. 조립 설명서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야. 부품 찾다가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어. 부인이 부품 찾는 걸 도와주면서 속도가 붙었어. 완성해놓고 보니 정말 근사하더군. 포탑은 360도 회전하고 전차병은 세 명이나 탑승할 수 있어. 정 아쉬운 점을 찾다면 비율이 좀 작다는 거야. 의무차량에 비해 탱크가 작아...

 

 

마지막으로 트럭 차례야. 이 녀석은 생각보다 쉽더군. 내가 조립하지는 않았어. 어쨌든 큰 블럭들이 많이 들어가서 술술 조립되더군. 다 만들고 군인들을 태웠지. 마지막으로 선물받은 레고 미니 피겨를 태워서 연출도 마무리했지.

 

 

참, 인형 하나가 팔이 없더라구. 옥스포드에 A/S 메일을 보냈으니 기다려봐야겠지. 부인은 표정을 보나 상품 사진을 보나 웬지 납득이 간다고 하는데 말야. 설마 아동용 장난감인데 정말 이런 걸 표현했을까 싶더라구. 잘 뜯어보니 외팔 인형은 하나도 없었어.

 

 

단체 사진을 찍어보니 꽤 그럴 듯 하더군. 나는 소인국에 쳐들어간 걸리버가 된 느낌이야. 난 이런 걸 왜 수집하나 싶었는데, 직접 해보니 이해가 되더라구. 앞으로 매달 한 개씩 사려고 해. 난 전시해놓는 건 관심없어.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 그런 게 좋지. 근사한 것들은 사진으로 찍어놓으면 되겠지. 인생의 기쁨을 느끼고자 노력해야겠어. 무엇보다 돈 말야. 슬로우 뉴스의 한 기사를 보니,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다며? 지적인 자유는 물질에 의존한다고. 나도 그걸 느꼈어. 돈을 숭배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위해 살고 싶어. 장난감 하나 살 경제적 여유마저 없다면 내 인생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그래서 더욱 더 난 나의 경제적 가치를 입증하고 싶다구. 여기서 백날 떠들어 봤자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자꾸 자꾸 되새기고 싶군. 그래야 내 자신의 행실로 드러날 테니 말야.

 

참 승진 완구에서 봤던 한 손님이 생각나는 군. 카운터 옆에 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직원에게 이렇게 묻더라구. '왜 이렇게 비싸요?' 그래, 나도 소용 없는 짓인지 알면서도 하는 것들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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