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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상문

그와 그녀의 목요일

by ehei 2013. 2. 17.

 

연극을 정말 오랫만에 보게 됐어. 부담없는 내용 덕에 뮤지컬을 몇 번 봤어. 최근에 본 건 '빨래'였지. 꽤 인기 작품이라고 하더군. 동생 부부의 선물로 봤어. 재미는 있었지만 너무 뻔한 내용은 아쉽더군. 내용 자체가 클리셰 덩어리니까. 악덕 고용주, 선한 연인들, 지독한 가난함.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 어디서 보니 그래야 관객의 몰입도가 높아진다고 하더군. 하긴 소자본 예술에서 내가 투자자라도 모험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 근데 연극은 왜 눈길이 잘 안 갈까. 뮤지컬은 그냥 흥겨운 맛에 보지만, 연극은 괜히 심각할 것 같은 기분 때문일까. 이런 관람작도 동생의 선물로 봤지. 근데 자칫하면 못 볼 뻔했어. 멍청하게 예약 날짜를 설날로 한거야. 다행히 빈 자리가 남아 있었나봐. 예약을 바꿔주더군. 한국에서 가끔 느끼는 융통성에 무척 감사했지.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남녀에 대한 걸까. 사실 성은 누구나 갖고 있고, 연애도 누구나의 로망이니 끝도 없이 나올 수 있겠지. 자꾸 자꾸 반복돼도 팔팔해 보인단 말씀이야. 개인적으로도 연애담을 좋아하지. 서로 달리 살아온 인격이 충돌하고 화합한다. 기쁘고 슬픈 감정을 느끼는 일들 말야. 너무 너무 궁금해. 누군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일생을 나누지.

 

이 연극은 그런 아주 아주 사소한 얘기야. 등장 인물은 간단히 남녀로 정리할 수 있군. 그리고 그들 과거의 표상, 미래의 표상. 나이 들면 까먹을 것 같고, 나중에 기억할 수 있게 적어놔야지. 주인공은 성공한 여기자지만 위암에 걸려 은퇴했어. 때 마침 오랜 남자 친구가 찾아오지. 뜬금없이 그는 매주 목요일마다 주제를 정하고 토론을 하자고 하지. 사실 듣자보면 강의나 다름없어. 공교롭게도 철학 교수지. 웬지 교수하면 누군가에게 설교하기 좋아할 것 같잖아? 딱 그런 캐릭터야. 듣다보면 말이 어딘가 이상하지만 흠잡을 데란 없어. 그런데 그가 이런 이상한 제안을 하게된 데는 이유가 있었지. 둘은 대학생 때 우연히 만나 우정을 거쳐 사랑까지 했던 사이였지. 감정의 묘한 교착으로 매듭은 묶지 못했지만 말야. 사랑의 결실은 딸도 하나 있고. 임신한 여주인공은 때마침 결혼 소식을 알리는 남자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해. 해외 특파원 근무 중인 그녀가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딸은 할머니 손에 크고 엇나가지. 클럽 죽순이가 되어 혼전 임신을 하게 돼.

 

자칭 남자 친구가 보다 못해 그 사실을 생물학적 부친에게 알린거야. 교수는 몇 번 강의하다가 부담을 느끼고 이 사실을 편지로 쓰지. 자잘한 사건이 있고, 그와 그녀가 왜 인연을 맺지 못했는지 알게 되지. 순간의 선택? 뭐 그런거 아니겠어. 그게 잘못된 거라고 할 수도 없고. 결과 갖고 비난하기는 쉽잖아. 나도 나이를 먹다보니 알겠더라고. 나 또한 후회하는 나날이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걸. 그래도 매일 매일 실수하고 후회하지. 어쨌든 기자는 이 혼란스런 상황을 잊고자 다시 일을 시작해. 그녀가 출국할 찰나에 별안간 교수가 나타나지. 윽박지르듯 감정 고백을 하지. 그리고 일이 정리돼. 기자 집에 딸과 그녀의 남친이 들어오고, 교수 양반은 결혼을 미루고 느슨한 가족 생활을 하기로 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 있잖아? 이 연극은 그걸 몸소 보여줘. 잊지 못할 장면이야. 아직도 생생하다니까. 스틸 컷 같이 남아있어. 탁자를 비추는 강렬한 조명 아래 감정으로 치고 받던 남녀가 서로 웃으며 악수를 해. 그리고 서서히 어두워지지. 게임 엔딩으로 쓰고 싶을 정도야. 전율을 느끼고 눈물이 흐르더라구. 왜일까? 이성적으로는 이유를 모르겠더군.

 

이 연극에 반전 따위는 없어. 그래도 실화처럼 생생한 이야기라는 점이 무척 좋아. 진짜처럼 느껴지는 얘기. 어느 공중파에서 일요일마다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보여주는 가짜 다큐멘터리 말고 말야. 드라마를 통해 다른 삶을 보는 건 정말 즐거워. 간결한 무대도 좋고 연출도 좋고 조명도 좋아. 공연 장소인 '예술의 전당'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더군.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훌륭하지만 교수 역을 맡은 정웅인은 정말 그 사람 같았어. 정말 딱 맞았다고 할까. 엄청난 대사 양을 소화하는 것도 놀랍고 실수 하나도 없더군. 아니 느껴지지 않더군. 왜 진짜 연기자를 꿈꾸는 이들이 연극 무대를 거치는 지 알 거 같았다니까.

 

가는 길에 눈이 왔고 오는 길도 그랬어.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해준 연극에 감사하고, 이런 선물을 해준 동생도 고맙더군. 괜히 아버지 생각이 나고. 요새 들어 나는 무척 감상적이 된 것 같아. 나도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감정을 전해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군. 희망 사항이지만 끝 없이 추구해야겠지. 내 인생의 목표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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