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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상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by ehei 2011. 4. 25.

만 화는 홍길동전을 연상하게 한다. 잘 알다시피 홍길동은 서자의 차별을 견디고 일어서서 입신한다. 그러나 여기의 주인공은 조금 다르다. 차별을 받되, 제도의 테두리에서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우연한 계기로 견주 혹은 견자라 불리는 주인공은 봉사 검객 황정학의 간곡한(?) 설득에 이끌려 길을 떠난다. 이제 줄거리는 그들의 여행을 그리기 시작한다. 스승의 가공할 실력과 정신적 풍부함을 보여주면서, 극복과 성장을 위해 따라야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그러면서 이몽학, 백지, 방짜쟁이, 이장각 등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인물들이 나름대로 상황을 견디고 꺾이는 모습을 그려준다. 끝까지 작가는 담담하게 이들의 여로를 그리고 있다. 활자와 그림을 동원하는 만화 만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심리 묘사는 단연 일품이라 할 수 있다. 기와장이 우루루 떨어지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일품이었다.

 

제목에서 언급된 것처럼 달은 이 만화의 중요한 화두로 취급된다. 이야기의 시작도 막바지도 달이 있다. 황정학은 서른 가지 모습을 보이는 달을 언급한다. 달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장치들이 종종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쓰임을 알고 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얼토당토한 생각을 같아 붙이자면 이렇다. 실상 달의 모습은 하나 아닌가. 다만 햇빛에 따라 차고 그믄다. 달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환경에 저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삶을 즐기면 될 뿐이다. 구름 속에 있을 때도 있겠지만, 깜깜한 밤 중에도 달빛 - 자신의 존재를 환하게 드러낼 수 있다.

 

사실 주인공보다 늙고 못 생겨서 그렇지, 황정학은 훨씬 환한 존재이다. 아니, 진짜 주인공이다. 작가의 농간(?)으로 그에게는 미녀들이 쫓아다니지 않지만, 정말 매력적이다. 듣건대 영화에서도 그의 존재 만이 단연 일품이라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성장 만화의 탈을 썼지만, 그는 스승의 울타리를 넘지 아니한다. 밈(meme)이 옮은 것처럼 또 하나의 황정학이 탄생한다. 주인공이 성장할 수록, 그의 개성은 사라진다. 스스로의 한계를 깨려는 시도는 이미 황정학 자신은 어렸을 때 겪은 그대로이다. 무엇보다 황정학은 주인공보다 더 엄청난 장애를 스스로 이겨내고 정점에 선 인물이다. 격이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만화는 뒤로 갈수록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개성의 두 인격이, 하나로 되어버렸다. 이야기의 풍부함이 그만큼 줄어든다.

 

대신 사랑을 쫓아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쫓는 여성들이 등장하나, 사실 그들에 대한 묘사는 단편적이다. 그저 적극적일 뿐, 당위성이나 개연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주인공의 현란한 칼솜씨에 반했다라고 밖에 추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뛰어난 재색과 지성을 가진 그들이 우직하기만 한 검객에게 목숨을 거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몽학은 멋지지만, 그의 성격을 알만한 부분은 처음 뿐이다. 멋진 그림과 글이 가득하지만,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퇴장하는 후반부로 갈수록 비어가는 느낌이다. 처음에 보여주었던 인상깊은 설정과 매력적인 등장 인물들이 아쉬울 뿐이다. 견자는 도무지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한다. 왜병을 상대로 섬멸전을 선보이지만, 갑자기 병법가로 변신하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만인적(萬人敵)과 맞먹는 가공할 무력도 보여주지만, 이 부분은 피리부는 몇 장면과 몇 줄의 글로 대체할 뿐이다.

 

단점을 길게 언급했지만, 이 만화는 정말 대단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 사실 꼭 보기를 추천한다.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내 부인도 그 자리에서 다 읽었을 정도이다. 물론 나도 그렇다. 재미있는 대사들이 많아 진지하기만 한 분위기를 잘 누그러뜨려 준다. 곳곳에 배치된 시(詩)들이 만화를 사군자화처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황정학은 정말로 매력이 넘친다. 그의 대사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제목은 얼마나 멋진가? 이토록 멋진 제목은 본 적이 없다. 그저 되뇌이기만 해도 여운이 오래 간다. 노래처럼 말이다. 결말 또한 제목처럼 오래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적절한 시점에 끝을 맺는다. 더 길어졌다면 그저 그런 만화가 되었을 것이다. 덕분에 환한 달밤에 여주인공이 조용히 말하는 끝 부분이 아직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이 만화는 정말로 한국적이다. 이 땅에서만 볼 수 있는 여러 장치와 약간의 철학적 내용을 섞어 근사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게임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칼과 로맨스가 있는 성장 이야기... 동양 중세 시대를 멋지게 그릴만한 소재 아닌가. 물론 원작과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새로운 전개 기법을 보여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멋진 작품을 완성해낸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내게 그런 정신이 필요한 건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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