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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상문

푸른 끝에 서다

by ehei 2011. 5. 3.

역사의 화려한 모습 속에 잊혀진 자들을 생각해본다. 명장이 탄생하기 위해 죽어야했던 수많은 사람들. 성공을 위해 실패해야만 했었던 이들. 삶을 짧게 태워야만 했던 이들. 이 만화책은 역사의 그런 면을 생각하게 했다. 주인공은 평범한 징집병이다. 제대를 얼마 앞두고 나선 그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게 된다. 그리고서는 기무대로 연행된다. 소소한 일상이 그려지는 짧은 초반부는 그렇게 끝난다. 내용 중 절반은 그가 있지도 않은 죄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나머지는 재판 대기라는 명목으로 오랜 기간 동안 영창에 연금되서 겪는 고초를 그리고 있다.

  

가장 압권은 죄가 창조되는 과정을 묘사한 중반부이다. 기무대 수사관은 투철한 직업관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예술을 펼친다. 그들이 상대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소설 '배틀 어스'의 회색인이 말하듯 '순수한 비즈니스' 일 뿐이다.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있었을까? 같은 상황에서 강경하게 결백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캄캄한 지하실에 가두고, 고문실도 보여준다. 영창에 가두고서는 한층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자신들의 말을 따르면 뭐든 쉽게 풀릴 것처럼 조장한다. 무섭다. 극우와 극좌는 하나라더니 소련과 다를 바가 없다. 솔제니친의 '포로 수용소'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긴, 소련 쪽이 좀더 가혹했음은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거기는 기본이 10년 형이었다. 그러나 행태는 비슷하다. 거기서도 없는 죄를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인정하게 만들었다. 정말 죄가 있어 들어왔다면 이토록 억울하게 그려지지도 않았으리라...

 

그런데 웬지 쥐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만화의 전개나 일부 컷은 쥐를 연상하게 했다. 차분하게 상황을 그려나가서 그런가? 어쩌면 기억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영창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우슈비츠와 비교할 수는 없다. 상황은 심각한 반면 사건의 흐름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사실 보기만 해도 지루하고 숨막히는 곳이다. 반면 절박한 사건 같은 건 없다. 작가는 단순한 사상범일 뿐, 적극적인 학생 운동가도 아니고(책에서는 그렇게 그려진다),  사형이나 장기 복역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곳에서의 작가 자신의 모습 또한 담담하다. 책 제목 뒤에는 1이 붙어있다. 고로 이번 편이 끝이 아니라서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가 내게 카타르시스를 줄 지는 모르겠다. 사건들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예상하건대, 풀려나서 사회에 나와서 방황하는 과정이 그려질까? 담백한 건 좋지만 조금 싱거운 기분이 든다. 어쩌면 뒷부분이 진짜일지도 모른다. 마땅히 후편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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