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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상문

자학의 시

by ehei 2012. 10. 8.



가정폭력은 피해받는 당사자의 고통이 가장 심할 터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내 부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혼했다. 그러기까지 어린 내가 보기에 불편한 사건이 밤마다 자주 일어났다. 새벽녘에 소란한 소리로 깨어난다. 그러면 술 취한 어머니, 고성을 높이는 아버지, 깨지거나 나뒹구는 집안 소품들이 어우러지는 화음이 들린다. 이제 나는 불꺼진 방 이불 속에서 무서운 마음에 조마조마할 차례이다. 소심하고 겁많던 나. 온갖 공상으로 그걸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그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런 것이 평생 각인되어 싸움을 피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 때를 생각하면 그 기억은 무섭게 다가온다. 언제인가 이런 얘기를 좀더 자세히 쓸 때가 올 터이다. 일단 내 가족사 서술은 접어두자.


아무튼 이 책은 가정 폭력에 대한 책이다. 제목은 절묘하리만큼 어울린다. 이보다 나은 제목을 생각할 수 있을까. 경마, 마작에 유흥만 일삼는 자발적 실업자인 남편은 부인에게 온갖 폭력을 행사한다. 부인에게 직접 폭행을 하는 장면은 없던 것 같다. 대신 부인에게 모든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주제에 걸핏하면 상을 엎고 가구를 부수고 행인을 때린다. 주문한 냉장고를 그날로 전당포에 판다. 생활비로 쓸 돈을 빼앗고 친구를 초대하고는 부인은 벽장에 재운다. 옆집에 가서 대놓고 돈을 꾸어오기를 강요한다. 반면 그녀는 그가 가끔 보이는 거친 애정 표현에 감사하고 보답한다. 그녀는 불행의 아이콘이다. 아비 또한 그녀를 일찌기 일터로 내몰고 몇 푼 안되는 책이나 신발을 내다 팔아버린다. 그 돈은 쓸데없는 잡기에 낭비된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불행에 만성이 되어서 웬만한 건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묘하게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일터의 사장이다. 그녀를 위해 가불도 해주고 가게도 비운다. 그러나 철벽 같은 그녀의 마음 안에는 남편 뿐이다. 일편단심이다. 그녀를 택했고 한때는 진심을 내보인 남편을 사랑하고 봉사한다. 추억이 있기에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할까.


그러나 사랑이라 생각하기에는 힘들다. 만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책장을 넘기는 것이 이리 힘들 줄이야. 끝까지 순종하는 모습이 마치 학대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정도로만 따지면 일전에 보았던 '어린 아내'쪽이 한술 더 뜬다. 그 책은 2권 중반 쯤 읽다가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거기 나오는 남편은 진실로 악의 집합체이다. 폭력적이고 변태에 무분별하고 낯짝도 두껍다. 결혼하게 된 사유도 어이가 없다. 빚에 내몰린 부모가 강제로 시켰다. 그래도 부인은 운명에 순응해버렸는지 속이 없는 것인지 꾸밈없이 대할 뿐이다. 마치 종교적인 구도를 하는 것처럼. 페스트가 유행할 때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해서 신의 형벌을 피하려 했던 수도자처럼. 남편의 정도는 다르지만 보여지는 부인의 모습은 유사하다.


책을 읽고나니 표지 또한 의미심장하다. 왼쪽에 있는 부인 손은 마르고 갸날프다. 맞은 편의 남편 손은 살도 오르고 매끈하다. 만화 안에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가정 폭력에 대한 경종이다. 약이 대체로 쓴 것은 이유가 있다. 마음이 불편한 것도 폭력의 무가치함과 잔혹함이 진실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리라. 내 자신에게 교육을 하는 의미로 끝까지 참고 보았다. 불편한 마음은 삭이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알아보니 2권도 있다. 허나 더 이상 읽고 싶지는 않다. 이 정도로도 충분한 예방주사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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