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사랑의 하츄핑’을 가족과 함께 보았다. 전형적인 아동 만화영화였지만 꽤 많은 노래가 삽입되어 있었다. 보면서 이야기 서사의 부족함을 이렇게 메꿀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한편으로 버림받아 폭주한 티니핑이 참으로 위험하구나 하면서도 애완동물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교훈극같은 느낌도 들었다. 티니핑을 짝궁으로 삼기 위해 벌이는 구애 비슷한 행동들을 보며 한편으로 왜 저렇게까지 티니핑을 소유하려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포켓몬스터를 보며 느꼈던 그런 것이었다. 사실 포켓몬 마스터는 애정으로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만 실은 포켓몬을 폭력과 대결과 전장으로 몰아가기 위한 도구이고 실상 그들의 행동은 검투사 노예 주인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런 불편한 측면을 강조한 공익적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소유에 기반한 물질적 존재이므로 그런 갈망을 벗어나는 건 보통 노력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끔 드는 죽음의 공허에 대한 두려움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관람 후에는 첫째 딸이 생일 선물로 운동할 때 쓰는 머리띠를 사줬다. 가격이 더 싸서 하얀색을 샀는데 부인이 계산 때는 더 비싼 검정색과 똑같음을 알려줬다. 고객센터에 갔더니 차액을 돌려주고 상품권도 주었다. 흔치 않는 소소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그 보상이 시간제 임금 노동자의 벌금으로 메꾸는게 아닌가 생각들었다. 하지만 부인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알고 보상을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양심적인 소비자임을 뜻하지도 않는다. 나는 부지불식 간에도 노동의 착취로 빚어진 결과물을 소비할 것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좀더 경제적인 성공을 이뤄 그걸 환원하는 길이라고 결론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