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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상문

소피의 선택

by ehei 2012. 4. 4.

평소에 EBS를 즐겨 본다. 주말마다 '세계의 명화'라는 프로그램을 한다. 얼마 전에는 '소피의 선택'을 방영했다. 상당히 긴 영화이다. 그럼에도 개성 강한 인물과 양파 껍질처럼 한 겹씩 나타나는 속사정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다. 앞으로 볼 사람은 글을 읽지 않는 편이 좋다. 사실 알아도 연출이 훌륭한 드라마라서 큰 흠은 되지 않는다.

 

소 피는 폴란드에서 왔다. 빈혈을 앓던 그녀는 도서관에서 실신한다. 마침 그 곳에 있던 생물학자인 제이슨을 만나 도움을 얻는다. 그는 그녀가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녀가 침대에서 눈을 뜨자 초라한 집은 아늑하게 바뀌었다. 요리를 하고 있던 제이슨은 술을 건넨다. 술은 너무 훌륭하다. 그는 제멋대로지만 강렬한 성격을 가졌다. 그녀는 그에게 빠진다. 그러한 그들의 삶이 스팅고라는 소설가 지망생의 눈으로 관찰된다. 제이슨은 장점이 많다. 매력적이고 지성적이며 정력적이다. 하지만 가끔 돌변한다. 그 때의 그는 야수다.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 뒤 사라졌다가 어느날 멀쩡히 나타난다. 그럼에도 소피는 그를 떠나지 못한다. 그녀의 아픔을 잊게 할 사람은 제이슨 뿐이다.

 

중반을 넘어서면 그녀의 아픔을 보여준다. 그녀는 나치에 협조했음에도 아이들과 함께 수용소에 끌려갔다. 학대와 학살이 기다리는 그 곳에 말이다. 남편과 부친은 이미 끌려간 뒤였다. 거기서 그녀는 모진 고생을 겪고 살아났다. 갈등이 모두 해소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비밀이 드러난다. 사실 제이슨은 마음의 병이 있었다. 차츰 그 병은 커져가고 마침내는 소피와 스팅고의 생명을 위협한다. 소피를 동경하던 스팅고는 떠날 것을 제의한다. 어느 호텔 방에서 그는 고백하고 청혼한다. 그녀의 마지막 고백이 이어진다. 그녀는 남매를 낳았다. 수용소에서 그는 끔찍한 선택을 강요 받았다. 남매 중 살릴 아이를 직접 선택하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결국 모두 잃었다. 그 충격은 그녀가 다시는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다음 날 그녀는 그를 떠난다. 숙소로 돌아간 스팅고는 마지막으로 그들 커플을 만난다. 침대에서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마음의 병을 앓던 둘은 스스로 삶을 등졌다. 스팅고는 브루클린을 떠난다.

 

재밌었다. 화면 안의 삶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어울리는 모습은 '사랑과 전쟁'의 흔한 내용을 떠올리게도 했다. 사실 그 드라마는 클라이막스만 있고 카타르시스는 없을 때가 많다. 이 영화는 다르다. 훌륭한 원작과 긴 상영 시간 덕에 이야기의 부족함이 없다. 제이슨이 멀쩡했다면 그녀의 상처가 고쳐지고 새 삶은 누릴 수 있었을까. 그럴꺼라고 생각한다. 허나 그의 네온사인 같은 개성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비극으로 끝난 영화지만 왜 슬프지 않을까. 영원한 안식을 취한 그들의 모습이 진정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이리라.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군대 시절에 안 사람이 있다. 밝은 성격에 말솜씨도 좋고 머리도 똑똑했다. 제대 후 어느날 이었다. 동생이 그를 언급했다. 동생이 다니는 회사에 그도 있었다. 나와 동생은 돌림자를 쓴다. 이름이 비슷한 동생을 보고 그가 나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그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의 목소리로 반가왔다. 만남도 기약했다. 그러나 바쁜 생활이 이어진다는 핑계로 좀처럼 날을 잡지 않았다. 반가움도 희미해질 무렵이었다. 동생이 그의 소식을 전했다. 죽었다고 했다. 살던 집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고 했다. 유서가 없어 동기도 딱히 모른다고 했다. 그저 실연이 이유겠거니 짐작한다고 했다. 나의 대책없는 태만을 후회했다. 소중한 인연이 사라졌다. 돌이킬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 또한 소피와 같은 선택을 했다. 어찌 되었든 스스로 내린 결정이고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규칙이나 도덕을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게 위안이 된다고 하자. 그들은 몰랐을까. 삶의 무게는 무겁다. 멀쩡히 살고 있는 나만 해도 후회하는 많은 일들이 기억난다. 차라리 이야기를 들어주면 어떨까. 굳어져있다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인터넷 덕분에 화제꺼리는 얼마든지 있다. 지구 어디서든 항상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진다. 얼마전에도 미국에서는 계피를 잔뜩 먹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올리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시덥잖은 것이어도 좋다.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자아를 느낀다. 주변에 힘든 사람이 보인다면 기꺼이 다가가리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함께 하리라. 같은 시간대를 스치는 나그네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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